최근 나는 김초엽 작가님의 『지구 끝의 온실』이라는 책을 읽으며 인공생명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책에서는 ‘더스트’라는 생명을 파괴하는 입자로 인해 재앙이 발생한다는 흥미로운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에서 소개된 ‘더스트’는 원래 자가 증식 나노봇으로 개발되어 분자 단위에서 물질을 통제하고 재조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극도로 소형화된 입자들이 통제를 벗어나며 스스로 복제하는 나노머신들이 지구를 집어삼키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더스트’와 같이 자가 증식 등의 생명체의 특징을 갖는 인공체는 인공 생명체라 하고, 이러한 특징을 갖는 인공체를 창조하기 위한 학문을 인공생명이라고 한다. 자가 증식 로봇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인공생명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에 필자는 이 글에서 살짝은 생소할지도 모르는 인공생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실의 인공생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인공생명에 대한 관심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인간의 창조 본능을 생각해본다면 그건 본능으로써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인공생명이 학문적으로, 즉 실질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인공생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헝가리계 미국 컴퓨터 이론가인 존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존 폰 노이만은 인공생명의 주요 핵심은 자기-재생산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증식을 하는 기계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48년 그가 발표한 자기 증식 자동자 self-reproducing automata 이론과 이로부터 3년 뒤에 새롭게 발표한 세포 자동자 cellular automata 모델이 대표적이다.
세포 자동자 모델은 폰 노이만이 컴퓨터 프로그램상에서 인공생명체를 만들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생화학적인 인공생명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상에서 인공생명체를 만들겠다고 주장한 이유는 당시가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생화학적인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던 시기였음에 있다.
또한, 폰 노이만은 프랑스의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가 주장한 ‘기계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계론은 생명과학의 관점으로 요약하자면, “살아 있는 생명체는 사실상 복잡한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다.
『지구 끝의 온실』 속에서도 기계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정비사인 ‘지수’가 식물학자인 ‘레이첼’이 키우는 식물들을 보며 식물은 정교한 기계인 것 같다고 하는 장면이다. 소설에서 결국 지수와 레이첼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되는데, 필자는 이 부분에서 작가가 생명체와 기계의 서로 매우 다른 듯 보였지만 알고 보면 유사했던 둘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다시 인공생명으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폰 노이만은 당시 컴퓨터의 연산 능력의 한계로 인해 자기복제를 하는 기계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존 코웨이 John H. Conway 등의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특히, 인공생명은 크리스토퍼 랭턴 Christopher G. Langton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장을 이루었다. 그는 폰 노이만의 세포 자동자를 응용하여 8개의 상태를 가지는 세포로 세계 최초로 가장 간단한 자기복제 세포 자동자를 창조했다. 랭턴은 이를 ‘랭턴 루프 Langton's loops’라고 명명하였는데, 루프의 놀라운 점은 단순한 몇 개의 규칙만으로 자기 복제뿐 아니라 창발적인 구조도 가진다는 것이다. 창발 현상, 즉 하위 수준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특성이 상위 수준에서 관찰되는 현상은 자기-재생산과 함께 인공생명의 주요 핵심으로 여겨진다. 1
이전까지는 모두 소프트웨어적인 인공생명의 발전이 있었지만, 1980년대부터 전자식 컴퓨터가 개발됨에 따라 인공생명 시스템들을 특정 하드웨어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탑재한 자가복제 기계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대표적으로, 1986년에 나노기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릭 드렉슬러 K. Eric Drexler는 그의 저서 『창조의 엔진』 Engines of Creation에서 어셈블러 Assembler의 개발을 제안했다. 어셈블러는 원자들을 한 번에 조금씩 큰 분자의 표면에 부착시켜 원자들을 결합하는 일을 하는 분자 크기의 나노 기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적절한 원자를 찾아 적절한 위치에 옮겨 놓는 분자 기계를 말한다. 드렉슬러는 이어서 1991년에 펴낸 『무한한 미래』에서 다수의 어셈블러가 함께 작업하여 모든 작품을 생산하는 분자 제조 개념을 내놓았다. 드렉슬러에 따르면 최초의 어셈블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자신과 동일한 또 다른 어셈블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즉, 어셈블러는 자기복제 기능을 가진 나노 기계인 셈이다.
익숙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책 속 더스트에 관한 설명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설 속에서 자가 증식 나노봇인 더스트의 원래 목적은 분자 단위에서 물질을 통제하고 재조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어셈블러가 실현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지구 끝의 온실』 같은 소설 속 이야기뿐일까? 드렉슬러와 동시대에 살던 미국의 화학자 리처드 스몰리 Richard E. Smalley는 이와 같이 어셈블러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깊은 의문을 표했다.
그가 가장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것은 바로 손가락(조작 장치)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는 어셈블러가 기능을 수행하려면 원자를 하나씩 집어 들고 원하는 위치에 삽입시키는 손가락이 달려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셈블러는 나노 기계이고, 나노 기계에 의해 제어되는 공간의 한 면은 1나노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공간의 제약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화학적으로 결합하려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일단 손가락에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큰 문제라고 스몰리는 주장했다.
이러한 스몰리의 강도 높은 비판에 드렉슬러도 반박하였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분자조립 기계인 리보솜을 예로 들면서 분자 어셈블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정말 『지구 끝의 온실』 속에서와 같이 현실에서 어셈블러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어셈블러의 구현 자체가 불가능하여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2005년 호드 립슨 교수팀이 스스로 같은 모양을 만들어 내는 로봇을 실제로 개발해 드렉슬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직 이 로봇은 나노미터 수준의 단계는 아니고 한 변의 길이가 10cm 정도 되는 정육면체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당 연구를 통해 분자 어셈블러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드렉슬러는 『창조의 엔진』에서 어셈블러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한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도 함께 내놓았다. 바로, 복제가 가능한 어셈블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해 인간의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오면, 나노 로봇이 지구 전체를 뒤덮어 멸망할 수도 있다는 ‘그레이 구’라는 가상의 시나리오이다. 맞다. 바로 『지구 끝의 온실』의 배경이 되는 시나리오이다. 만약, 『지구 끝의 온실』처럼 자가 증식 나노봇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하루 동안 2배 증식한다고 해도 빠르면 며칠 안에 지구를 집어삼킬 것이다.
글의 제목처럼 정말 ‘그레이 구’가 인공생명 연구의 미래가 될 지, 아니면 그저 기우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인공생명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분들께서 기술 개발 이전에 그 기술의 위험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주시기를 바라 본다.
- 한 마리의 개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수만 마리의 개미가 집단으로 모이면 개미마다 역할이 정해지고 분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한 마리 수준에선 관찰되지 않는 특성이 집단 수준에서 관찰되는 것, 창발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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